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르세니오 에리코 (문단 편집) == 선수 생활 == 아르세니오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에리코는 아버지에게 이탈리아 쪽의 피를 물려받았다. 11살 무렵부터 [[클루브 나시오날]]에서 뛰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어린 시절부터 두각을 보였지만 그의 조국 [[파라과이]]가 [[볼리비아]]와의 전쟁(차코 전쟁) 때문에 파라과이 리그가 중단되었고 나시오날은 외국으로 투어를 나다니게 되었다. 이 무렵 [[아르헨티나]]에서 벌였던 투어 경기를 보고 아르헨티나의 [[CA 인데펜디엔테]]와 [[CA 리버 플레이트]]가 에리코의 플레이에 관심을 보였다. 두 팀이 동시에 비드했지만 에리코의 선택은 인데펜디엔테였고 1934년에 데뷔전을 가지게 되었다. 비록 1934-35 시즌에는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는 바람에 시즌의 절반을 날렸지만 회복 후 에리코는 자신의 진가를 발휘했다. 두 팀이 동시에 알아본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 [[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|아르헨티나 리그]]에서 가장 무서운 스트라이커로 명성을 떨쳤다. 인데펜디엔테에서 13년간 활약하면서 3번의 득점왕을 차지였고 통산 득점이 293골로 [[리버 플레이트]]의 [[앙헬 라브루나]]와 같은 수치로 역대 [[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|아르헨티나 리그]] 통산 득점 1위에 올라있다. 라브루나가 20년간 올린 득점을 에리코는 13년, 325경기 만에 달성해냈으니 에리코의 득점 기록이 더 빛나는 것은 당연지사. 한편으로는 에리코의 통산 득점 기록은 295골로 아르헨티나 리그 역대 최다 득점이라는 주장이 있기도 하다.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[[아르헨티나인]]들이 자국인 라브루나의 위에 외국인 선수의 기록이 올라가는 게 자존심이 상해서 일부러 에리코의 기록을 2골 깎았다고 주장한다. 하지만 이런 대단한 기록을 가진 선수임에도 에리코는 공식 A매치 기록이 없는데 그 이유는 조국 파라과이가 전쟁 등을 겪으면서 [[코파 아메리카]] 등 국제 대회에 참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. 1937년 이후에 전쟁을 딛고 [[파라과이 축구 국가대표팀|파라과이 대표팀]]이 코파 아메리카에 참가하였지만 인데펜디엔테가 그의 참가를 만류했다.[* 에리코의 아르헨티나 생활 동안, 특히 1941년에는 봉급 문제로 에리코와 인데펜디엔테 구단 사이에 큰 갈등이 있었고 이 때 [[리베르 플라테]]와 [[산 로렌소]] 등 여러 팀들이 에리코를 노렸지만 인데펜디엔테는 그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] 오히려 1938년 즈음에는 아르헨티나 측에서 에리코에게 귀화 제의를 했지만 에리코가 거절했다. 선수에서 은퇴한 이후 감독으로 여러 팀을 돌아다녔지만 그리 좋은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고 1977년. 62세의 나이에 갑작스러운 [[심장마비]]로 숨을 거둔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